갤러리
GANGWON COMPREHENSIVE MUSEUM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어전용상
중국 청나라 황제가 업무를 볼 때 사용했던 탁자와 의자입니다. 용상에 수많은 용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는 이유는 용이 왕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12지간(띠) 중 용은 다른 지간(동물)의 특징을 하나씩 가져와 전체 형상을 이루고 있어 그 모습 자체가 조화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며, 비와 바람을 다스리고 여의주로 신기한 조화를 부리기도 합니다. 왕도 하늘과 땅의 중재자로서 천지만물을 조화로 다스린다고 여겼습니다.
2020.07.31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옥 비휴
·시대 : 한 무제 (BC 2~1C) 비휴는 용의 아홉번째 아들이자 기린(麒麟, 전설 속 동물)과는 형제인 중국 고대부터 내려오는 전설 속 동물인데, 지금은 재물신(財物神)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비휴의 생김새는 용의 머리에 말의 몸과 기린의 다리, 가늘고 긴 하나의 뿔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얼굴은 사자를 닮았으며 털은 회백색이고, 봉황의 날개와 꼬리를 가지고 있어 하늘을 날수도 있습니다. 즉 중국의 전설 속 하이브리드 동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휴는 용맹하고 신령스러운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제보(帝寶, 왕의 보배·보물)라고도 불립니다.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비휴가 왕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비휴에 대한 재미있는 설화 때문입니다. 커다란 입과 볼록한 배를 가진 비휴의 가장 큰 특징은 항문이 없고 입만 있다는 것입이다. 설화에 따르면 비휴는 금은보화를 너무 좋아해서 금은보화만 보면 씹지도 않고 무조건 집어삼키는 식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금은보화를 모조리 싹 다 먹어 치우고는 천궁 여기저기에 똥(dung/ poo)을 싸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에 노한 옥황상제가 비휴의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 주었고, 그 이후 비휴는 항문이 막혀 아무리 먹어도 배설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금은보화를 잔뜩 먹기만 먹고 배설을 할 수 없었던 비휴는 주인의 집에 돌아갈 때면 먹은 금은보화를 다시 토해내었다고 하여 비휴가 큰 재물복을 가져다준다고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2020.07.30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사모바르
시대 :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 (1906년) 사모바르는 러시아어로 ‘자기 스스로 끓는 용기’라는 뜻으로, 차를 마시기 위해 따뜻한 물을 끓이기 위한 용기입니다. 18세기에 홍차가 보급되면서 함께 발달되었으며, 겨울이 매우 추운 러시아 가정에선 없어서는 안 될 생활용구 였습니다. 차문화가 발달한 러시아 사회에서 사모바르는 가정의 상징이며, 편안하고 친근한 교재를 위한 도구였습니다. 이 사모바르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대관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며, 1917년까지 황제가 사용한 것입니다. 재질은 청동이고 18K 도금이 되어 있습니다. 당시 니콜라스 2세가 사용하던 상태 그대로이며, 황실과 황제의 인증, 로마노프 왕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2020.07.30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시타코사우루스
시대 : 백악기( 1억 2,000만년 전) 크기 : 가로1.8m X 세로 0.8m 산출지 : 중국 시타코사우루스는 백악기 초식공룡으로 가장 원시적인 각룡(뿔공룡)에 속합니다. 시타코사우르스는 앵무새부리 모양의 주둥이 때문에 ‘앵무 도마뱀’이라고 불립니다. 시타코사우루스는 각룡류에 속하지만 머리에 특별한 장식이 없고, 체구도 작아 각룡으로 보이지 않지만 높은 입천정 뼈와 옆으로 확장된 광대뼈가 각룡임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몸의 길이는 개략적으로 2m 전후이며, 몸무게는 20kg 정도되는 작은 공룡에 속합니다. 이들은 백악기 전기에 등장하여 백악기 말기에 멸종했습니다. 시타코사우루스는 앞다리가 긴 편으로 다목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먹을 때는 손처럼 뻗어 나뭇잎을 잡고, 걸을 때는 땅을 짚어 사족보행이 가능하였습니다. 화석에서 관찰되는 긴 꼬리의 역할로 보아 지속적이면서도 매우 빨랐을 것으로 보이며, 이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빠른 발을 이용해 도망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시타코사우루스 화석은 유라시아지역 여러 곳에서 발견되며, 위석(胃石)이 있는 화석의 발견으로 위석(잔돌)을 이용해 씹지 않고 삼킨 먹이를 잘게 갈아 소화시켰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위석(모래주머니)은 현재 악어, 닭, 타조와 같은 동물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2020.07.30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청화다호
·백자 청화 두 아이 그림 차주전자 ·시대 : 청(淸) ·산출지 : 안휘성 ·용도 : 음식기 이 주전자를 살펴보면 복부는 볼록하며 입구가 강조된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어깨에는 4개의 고리가 있어 손잡이용 끈을 연결하거나 금속으로 장식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복부에 두 명의 아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 아이 중 왼쪽아이는 한 손에 연꽃을 들고 있고, 오른쪽 아이는 두손으로 합을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묘사는 중국에서 화합과 길상을 표현하는 풍속화 형식 중 하나입니다. 자기의 질은 상품(上品)의 흙으로 빚어 표면이 매우 매끄럽습니다. 유색은 맑고 빛이 나며 문양장식은 고고(高古)하면서도 순박해 보입니다. 이러한 주전자는 민간에서 대중적으로 사용한 차(茶)주전자 입니다. 차문화를 일찍 일으킨 것은 중국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나쁜 자연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수질이 좋지않아서 찻잎을 끓여 마실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차가 발달했다는 것입니다. 나쁜 환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좋은 차(茶)문화를 이룬 셈입니다. 과거 중국에는 ‘다관(茶館)’이라는 곳이 있어서 서민들이 모여 수박씨도 까먹고, 차를 마시며 정보도 교환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일을 ‘다반사(茶飯事)’ 혹은 ‘항다반사(恒茶飯事)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래하여 ‘다반사’란 말이 생겨났으며, 우리가 항상 차를 마시는 것처럼 '늘 예사로 있는 보통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2017년 통계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이 1년 동안 박물관을 관람한 횟수가 0.7회입니다. 박물관 관람이 다반사가 되길 희망하며…^^
2020.07.29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장군
• 시대 : 조선시대(15C) 장군(紋缸)이란 물이나 술 등의 액체를 담아 옮길 때 쓰는 그릇으로 주둥이를 좁게하여 운반에 용이하도록 만든 자기입니다. 장군은 조선 초기에 분청사기나 백자로 많이 만들어졌던 그릇 종류 가운데 하나로, 고려나 조선 중기 이후 도자기에서는 그 예를 찾아 보기가 어렵습니다. 이 자기는 타원형의 둥근 몸통에 주둥이와 굽이 달렸으며 백토를 두텁게 바른 다음 문양을 남기고 긁어내는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분청사기는 대부분 지방의 민요(民窯)에서 제작되어 도공 스스로 창작하였기에 다양한 분장기법을 통한 자유분방함과 소박한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도자기입니다.
2020.07.29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
작가 : 하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 (고대 그리스, BC1세기)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하늘의 비밀을 발설했다’는 죄로 인해 신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던 트로이의 사제 라오콘을 조각한 것입니다.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이 끝나갈 무렵, 그리스인들이 보낸 목마 안에 군인들이 숨어있음을 예상한 라오콘은 이 목마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미리 알려주었습니다. 이를 본 신들은 트로이를 멸망하게 하려는 계획이 실패하자 두 마리 거대한 바닷뱀을 보내 라오콘과 그의 아들을 죽였다고 전합니다. 이 작품은 서사 중 가장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조각하였으며, 라오콘의 모든 감정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게산드로스, 폴리도로스, 아테노도로스의 합작으로 헬레니즘 시대(BC.3~1) 조각 중 최대 걸작으로 불립니다. 이전 고전기(BC.5~4) 조각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성과 표정(감정) 등을 볼 수 있습니다. [고전기에는 이상성(理想性)을 추구하여 균형과 조화를 이룬 신상(神像)만을 조각하였습니다. 신(神)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020.07.29
박물관 소장 유물 이야기 - 금사옥포
- 금실에 옥을 꿰어 만든 한대(漢代) 귀족의 수의(壽衣) - 시대 : 중국 서한 (BC.206년) 금사옥포란 옥편(玉片)을 금실로 꿰어 만든 수의(壽衣)를 말합니다. 중국 한대(漢代)의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구규(九竅), 즉 눈·코·입·생식기 등 9개의 구멍을 옥으로 막으면 시체를 차갑게 하고 정기가 빠져나가지 않아 시체가 부패하지 않고 신체가 보존되어 내세에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믿음에 연원하여 옥의(玉衣)로 신체를 감싸는 장례문화가 발달되었습니다. 이 옥의는 2천여 개의 옥편을 동실로 꿰어 제작한 것으로 머리 덮개, 상의, 소매, 장갑, 바지, 신발 부분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옥의는 전국 시대에 사용했던 옥을 묶은 마스크에서 의복으로 발전된 것인데, 서한(西漢) 중기 이후 대량으로 나타납니다. 당시 옥의를 제작하는 일은 엉청난 비용과 시간, 노력이 소모되는 일 이였으며, 옥의를 제작하는 관청을 따로 두기도 하였습니다. 실로 화려함을 자랑하는 옥의였으나 삼국 시기에 조비가 옥의에 대한 금령을 내리면서 옥의로 장례를 지내는 문화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영원불멸을 상징하는 이 옥수의는 아이러니하게도 후세에 도굴의 대상이 되어 오히려 무덤을 훼손 시키는 결과를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2020.07.29